얼마 전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습니다. 박진감이 넘치는 스포츠 경기를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시선을 끌었던 것은 바로 화려한 개막식이었습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연출 감독의 말처럼 위엄이 느껴지는 사신도가 무대를 뛰어다녔고, 사람의 얼굴을 한 상서로운 새인 인면조는 오랫동안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로 그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사진출처 : usmagazine)
이러한 계기로 최근 한국의 전통미술에 대한 관심이 더해지고 있는데요. 이에 발맞춰 이번 미술이야기에서는 독창적인 한국의 이미지를 구축했던 ‘진경시대’의 예술,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회화에 대해 논해보려 합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의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그리고 혜원 신윤복이 활동했던 시대로 익숙한 진경 시기는 새로운 양식을 구축하고 인간 개개인의 삶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르네상스라고도 불려집니다. 이제 조선 후기의 회화가 문화적으로 꽃피울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과 진경시대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펴보고, 이 시대를 대표했던 화가들의 작품을 함께 감상해보겠습니다.
진경 : 참된 경치란 무엇인가
진경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경산수화로 더 친숙한 단어인 ‘진경(眞景)’은 말 그대로 참된 경치를 뜻하고, 진경시대란 일반적으로 18세기 조선시대 후기를 일컫습니다. 여기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또 하나의 질문은 바로, “그렇다면 참된 경치란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진경 시대 화가들이 생각했던 진짜 경치는 바로 우리의 산천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그린 작품이 참되고 독창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까닭은 이전에는 우리의 것을 그린 작품이 적었을 뿐 아니라, 그려지더라도 중국의 유형화된 표현법으로 그려져 이것이 조선인 것인지, 중국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를 회의적으로 바라본 당대 문인들과 화가들은 점차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 경관과 소박한 조선의 생활상에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강희안, <고사관수도>, 종이에 먹, 15세기ㅣ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바위에 기대어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고사를 그린 조선 초의 작품으로, 인물의 생김새와 자연을 묘사한 기법이 우리의 삶을 연상시키기 보다는 중국화풍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진짜 경치를 그리기 시작하며 조선의 독자적인 화풍을 계발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우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의 화풍을 모방해오던 조선의 회화는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2)과 1636년 병자호란3)의 양란을 경험하며 그 양상을 달리하기 시작합니다. 양란의 여파로 1644년 명이 청나라로 교체됨에 따라 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붕괴되었고, 명을 숭상하고 그 외의 종족을 오랑캐라 칭하고 배척하던 조선의 정체성까지 크게 뒤흔들었습니다. 이후 한반도에서는 공석이나 다름없는 중화의 종주국 역할을 조선이 대신한다는 이념인 ‘조선중화주의’가 성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조선중화의식은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으며, 회화사적으로는 중국적 산수의 단절과 함께 독자적인 화풍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우리 고유의 산수, 진경산수화
조선의 문화적 고유성은 풍속화보다는 산수화에서 먼저 발현되었습니다. 당대 화가들은 대체로 양반가문 출신으로 서민들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풍속화가 만연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습니다. 먼저 등장한 진경산수화는 양식적으로 점차 중화 풍의 산수 표현법을 탈피해갔으며 조선의 기후와 지형에 걸맞은 화법을 새롭게 정립해나갔습니다. 대표적인 화가와 그의 작품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진경산수화의 면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정선, <금강전도>, 종이에 수묵담채, 1734ㅣ리움미술관 소장
진경산수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겸재 정선은 이상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어 오던 중국의 여산4)이 아닌 조선의 금강산을 선택하여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금강전도>에서 겸재는 고정된 시점이 아닌 다양한 곳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풍경을 한 장면으로 조합한 이미지를 그려내며 이전 시기의 형식화된 중국식 산수 배치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더불어 토산과 화강암 산이 공존하는 조선 산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중국의 남・북방의 화풍을 융합한 양식은 정선이 구축한 진경산수화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정선의 산수화는 당대에도 이미 그 독특함과 뛰어남을 인정받았었는데, 정선과 교우 관계가 깊었던 선비화가 조영석이 서술한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풍속화, 우리의 삶을 그려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경은 ‘조선의 산천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의미하는 만큼, 진경시대에는 산수화와 더불어 사람들의 생활상이 담긴 풍속화도 성행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풍속화는 주로 서민들의 생활 속에 담겨있는 재미있는 소재를 포착하여 해학이 넘치는 미의 세계로 삶을 구체화합니다. 농사일과 같은 생업활동, 빨래를 하는 여인들처럼 양반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 일반 서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후기 풍속화는 대체로 왕실 혹은 양반으로 대두되는 지도자 층의 행사를 그림으로 남겨오던 기록화 성격의 전기 풍속화와는 그 소재 면에서 큰 차이가 느껴집니다.
조선 후기 진경시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는 단원 김홍도였습니다. 당대 문화적 부흥을 이끌었던 정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그는 서민과 사대부를 아우르는 계층의 평범한 일상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중에서도 서민층의 생업 장면과 민속놀이를 주로 포착하고, 공간감이 느껴지는 구도와 익살스러운 표정 묘사를 통해 역동적이고 활기가 느껴지는 생의 순간을 담아냈습니다.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중 <씨름>, 종이에 엷은 채색, 18세기ㅣ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 중 <씨름>은 생의 활기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씨름을 구경하는 군상들이 아래 위로 호를 그리는 원형의 구도는 바라보는 이에게 안정감을 줌과 동시에 화면 중앙의 씨름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유도합니다. 또한 각각의 인물들은 표정이 모두 달라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는데, 서로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씨름꾼들, 예측할 수 없는 경기에 입을 벌린 사람, 거기에 태연자약하게 엿 판을 메고 딴청을 피우고 있는 젊은 장수의 모습은 마치 그 순간에 함께 있는 듯한 상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사실적입니다. 단원이 그려낸 다채로운 표정들은 순간순간의 감정을 표출하는 행위를 사회적으로 제한하고 정형화된 인물 묘사에 그쳤던 전기의 그림들 대신 당대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큽니다.
한편 김홍도의 제자 혹은 동료로, 속설에는 연인으로도 여겨지는 혜원 신윤복은 풍속화가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신윤복 역시 사람들의 즉흥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스타일로 김홍도의 작품과 유사하지만 소재의 선정이나 구성 면에서 단원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특징적인 부분은 바로 젊은 남녀 간의 애정문제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신윤복, 혜원 전신첩 중 <월야밀회>, 지본채색, 18세기ㅣ간송미술관 소장
<월야밀회> 속 밝은 달이 뜬 밤에 남녀가 담을 등지고 만난 모습은 몽환적인 분위기와 함께 애틋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담장 너머로 지켜보는 다른 여인의 시선은 세 인물이 품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지체가 높아 보이는 양반의 밀회를 상상케 하여 감상자에게 해학적인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역사가 깊은 화원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뛰어난 재주로 활동했던 그가 지나치게 속스러운 그림 때문에 도화원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명확한 근거가 없는 유추해석일 뿐이지만, 혜원이 기존에는 그려지지 않았던 남녀간의 관계를 잘 다뤄냈음을 반증해주는 듯합니다.
한 예로 임상희 작가는 시간의 흔적이 묻어나는 달동네를 인위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냅니다. 무분별한 도시 개발 정책의 산물인 획일화된 도시 풍경을 지양하는 작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녹아져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는 달동네를 세밀히 표현하며 이상적인 도시의 형태를 제시합니다. 쉽게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풍경을 조명함과 동시에 다양한 시점이 한 화면 속에 담긴 구조는 소재와 형식적인 면에서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떠오르게 합니다.
사진으로 찍어내듯 달동네를 사실적으로 그린 임상희 작가와는 다르게 최은숙 작가는 현재와 과거가 병치되어 있는 구성으로 전통시장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나타냅니다. 조선시대의 풍속화에서 빠져 나온 듯한 인물들이 현대의 시장을 거니는 모습은 만화 속 장면을 보는 것 같아 유쾌하게 느껴집니다. 작가는 개인적으로 추억이 깃든 시장이라는 공간을 사실적으로 나타내면서도 가상의 인물과 결합하는 독특한 구성을 통해 잊혀져 가던 우리의 풍경들을 화면에 재치 있게 담아냅니다.
오늘날 핸드폰만으로도 눈 앞의 풍경을 담아내는 일이 쉬워진 상황에서 진경을 찾고 이를 화폭에 옮기는 행위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풍경을 있는 그대로 사진에 담는 것과 작가의 개인적인 관심이 담긴 지역, 혹은 시대적으로 공유되는 가치가 담긴 ‘진짜 풍경’을 찾아 그려내는 것은 그 의미가 확연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임상희 작가가 달동네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고 최은숙 작가가 북적거리는 시장이 품은 정을 그려내듯, 주변을 한 번 둘러보세요. 여러분들의 마음이 깃든 진짜 풍경은 어디인가요?
지금까지 18세기 조선시대에 사실적인 표현을 바탕으로 우리의 삶에 대한 애정을 담은 진경산수화, 진경풍속화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예를 중시하고 숭고한 정신성을 우선으로 여겼던 조선 사회에서 우리의 산천과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소소한 감정들을 표현한 것은 그 전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큰 변화였습니다. 이러한 변동은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고취된 국가적 자부심과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국가 경제의 발전을 발판으로 가능했습니다.
더불어 오랜 시간 중국의 화법을 답습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한 기술력 역시 우리의 산수를 독창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즉 이 시대에 그려진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는 단순히 풍경을 있는 그대로 모사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문화적 역량이 집결되어 이룩한 결과물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큽니다. 2018년 동계올림픽의 인면조, 사신도에서 촉발된 한국의 전통미술에 대한 관심이 단발성으로 그치지않고 본 글에서 살펴보았던 진경산수화, 풍속화뿐 아니라 한국의 문화 전반으로 확대되고 지속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용어해설
1) 진경이란 표현은 18세기 문인화가인 표암 강세황이 자주 사용하면서 하나의 뚜렷한 회화사적 용어로 당대에 정착했으며, 후대의 학계에서는 이를 토대로 조선 후기 전반을 진경시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2)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한반도에서 벌어진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전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공으로 발발했습니다. 조선과 호의적 관계를 유지하던 명은 원군을 파견하여 조선의 승리를 이루어냈지만 결과적으로는 국가 재정 파산과 군사력 약화를 야기하여 국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3) 1636년 여진족이 세운 국가인 후금(이후 청나라)이 2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입한 전쟁으로,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맹약을 맺으며 조선의 근간이었던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청과의 군신관계를 확립하게 됩니다. 막대한 피해를 입힌 청에 대한 적개심이 강해지자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는 대신 우리의 것을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풍토가 싹트기 시작하게 됩니다. 4) 여산은 중국 강서성 성자현의 서쪽, 구강현의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경치가 빼어나고 예로부터 우수한 선비들이 숨어 사는 곳으로 인지되어 조선의 양반들이 평생에 가보기를 희망하는 곳입니다. 이러한 바램은 화폭 속에 담겨 조선의 산세를 표현할 때에도 여산의 형태로 나타내며 그 동경을 표현해왔었습니다.
참고자료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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